흔히 뉴욕에서 로컬 피플들이 인정하는 핫플레이스는 소호나 이스트빌리지 혹은 브룩클린 윌리암스버그를 꼽는다. 관광객의 입장이이었던, 아니 잠시 뉴욕에 거주했던, 아니 그 보다도 더 전에 뉴욕에 환장하고 있는 사람 중 하나로서, 나는 미드타운이 진짜 핫플레이스라고 생각한다. 


오랜시간 마음에 꽂혔던 어떤 한 대상이 변하는 일은 사실 별로 없다. 나는 어릴적부터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정말 마음속에 품어왔던 사람이라 한 번 보고 난 후에도, 아니 매일 같이 보는데도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대한 떨림은 변하지 않았다. 


그래서 회사가 32번가 한인타운과 가까워서 좋았다. 5번가에 위치해서 좋았다. 무엇보다도 어디든지 눈을 돌려도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육안으로 볼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. 유치하게도 어쩌면 그 빌딩 그 자체가 내 꿈 그 자체이니까. 




뭘 좀 아는 사람이라면, 아메리카노 정도는 마셔줘야지. 


별 웃기지도 않은 논리에, 그 논리를 체화한 채로 오랜시간 나는 카페를 가면 늘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. 다른 커피? 으. 촌스럽잖아. 하면서 말이다. 


그런 내가 뉴욕에 와서는 아메리카노를 사 마셔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. 서울보다도 더 화려한 뉴욕에 가니 뭘 좀 아는 사람에서 덜 떨어진 사람으로 격이 떨어진걸까? 하하하. 그건 아닐테다. 그저 나는 또 다른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만났을 뿐이다. 그 흔하디 흔한 카페라떼를 말이다. 




뉴욕에 오기 전 맛집이나 유명한 명소를 리스트업하는 것보다 나에게 중요한 건 카페를 리스트업하는 일이었다. 모두가 다 아는 Think Coffee 말고, 정말 로컬 뉴욕커들이 좋아하는 맛있는 커피를 만드는 곳. 잊지 못할 원두를 로스팅하는 곳. 그래서 내 첫번째 목적지는 스텀타운커피(Stumptown Coffee Roasters)였다. 그리고 두번째는 컬쳐 에스프레스(Culture Espresso)였고, 그 다음으로는 조커피(Joe of the Art of Coffee)였다. 


하지만 애석하게도 내 기억에 남는 카페는 단 한 곳이다. 물론, 그렇다고 위의 카페가 별로라는 소리는 절대 아니다. 당장 달려가 먹고 싶을 정도로 그리운 건 부정 못하는 사실이니까. 




버치커피(Birch Coffee), 내가 가장 좋아했고 가장 많이 갔으며 가장 그리워하는 곳이다. 


버치커피는 5Ave E 27th St 에 위치한 거슈인호텔(The Gershwin Hotel) 1층에 위치하고 있다. 거슈인 호텔과 연결된 2층은 다락방처럼 되어 있어서 한 번 앉으면 쇼파에 맞게 질펀하게 퍼진 궁둥이를 일으키기가 참으로 어렵다.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편한 분위기의 다락방이 있어 좋다. 다만, 갈 때마다 차마 그 궁둥이를 쉽게 일으키지 못하고 오랜시간 죽치고 있는 사람들 덕에 나도 실제로 딱 한 번, 그것도 5분 정도밖에 앉아있질 못했었다. 




주문대에 서자마자 나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카페라떼를 주문했다. 4월 말까지도 눈이 오는 미친 날씨의 뉴욕이었지만, 아이스는 포기할 수 없기에 아이스 카페라떼로, 이름이 뭐냐는 질문에 늘 그렇듯 Shasha라고 당당히 말하고, 정작 나온 컵에 Sasha라고 써 있는 걸 발견하며 '또!'라는 한 마디를 뱉으며 카페라떼 한 모금을 쭈욱 들이켰다. 


목을 넘어 식도를 타고 가슴까지 쭈욱 내려오는 시원함에 입을 떼자마자, 가벼운 감탄 한 번, 혀 뒤쪽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는 달콤한 라떼 맛에 긴 감탄 또 한 번.



그 때 길게 내뿜었던 감탄과 동시에 나는 매일같이 버치커피를 찾았다. 한국보다 싼 커피값에 왠지 더 좋은 카페 분위기에 내가 찾아갈 때마다 늘 내 주문을 받아줬던 귀여운 언니때문에 그리고 물론 기분까지 업시켜주는 달콤한 카페라떼맛에, 버치커피는 집보다 더 편한 곳이 되었다. 


All of places where I went, of course, was a lot more comfortable than my home, which have made me feel sick for 5 months.



미국은 어느 카페를 가든 이름을 물어본다. 나는 사실 스타벅스만의 전유물이라고만 생각했는데, 다른 개인 카페에서도 이름을 물어보는 경우가 많았다. 난 그게 좋았다. 유치하지만 난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줄때나 내가 누군가의 앞에서 말할때 왠지 모를 희열을 느꼈다. 내 이름을 들을 때나 말할 때나 아직까지도 손발이 오그라들고 헛웃음이 나오지만, 그냥 그 순간들이 항상 좋다. 


미국에 처음 도착하고 스타벅스에 처음 갔던 날, 흑인 직원이 내 주문을 받아줬었다. 이름을 물어본다는 사실을 진즉에 알고 갔었기 때문에 주문을 하는 와중에도 머릿속으로 내 이름을 말하는 그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. 드디어 기다렸던 한 마디, What's your name? 

나는 씨익 웃으며 'Shasha' 라고 답을 했다. 그러자 그 직원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더니 입꼬리 한쪽을 살짝 올리고 웃더라. 왜였을까? 지금까지도 그 직원이 왜 웃었는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, 혹시 내 이름 때문이 아니었을까. 어디선가 들었던 'Shasha(정확하게는 Sasha)라는 이름은 러시아나 흑인들에게서 많이 볼 수 있는 이름인데 동양인 이름이 그렇다는 점에 대해 kind of 이해를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' 라는 것에 일맥상통했으려나? 그날 주문한 커피 컵에 쓰여있던 건 Shasha가 아닌 Sasha여서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. 



문제는 그 날 이후로, 어딜가나 커피를 주문하고 이름을 말할 때 "Shasha, Not Sasha. S-H-A-S-H-A"라고 굳이 말하는 요상한 버릇이 생겼다는 점에 있다. 


버치커피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먹었던 브런치 Today's Special. 

퍽퍽한 샌드위치였지만, 후무스(Hummus)와 퀴노아샐러드가 있으니 불만제로.



핫 피플들이 많이 간다는 윌리암스버그나 이스트빌리지 구석에 위치한 곳이 아니고, 혹 어느 누군가에게는 멋없는 5번가 미드타운에 위치한 곳이지만, 왠지 그 자체만으로 멋이 있었다. 찾는 사람들도, 직원들도, 카페의 전체적인 분위기도 다 멋이 있었다. 입을 행복하게 해주는 커피말고도 눈도 충분히 즐거운 곳이었다.


커피 한 잔을 들고 나오면 유독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. 경쾌한 발걸음에 박자를 맞추듯 팔을 큼직큼직하게 흔들면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한 번, 사람들 한 번, 지금 손에 든 커피 한 번 번갈아가며 보면서 걷다보면 또 내가 좋아하는 곳에 도착해있다. 위에서 말했듯, 뉴욕의 모든 곳은 내가 좋아하는 곳이다. 집보다 더. 




한 번의 여행에서 모든 것을 다 보고, 누린다면 다음 여행때 다시 그곳에 갈 이유가 있어질까? <여행자도쿄>란 책에서 김영하는 만약 그렇다면 다음 여행은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하지만, 
나에게 여행은 단순히 무언가를 보면서 리스트에서 하나씩 지우는 것이 아니라 가장 행복했던 그 순간, 그 장소를 벗어나고 싶지 않아하는 것이다. 그래야 다음 번 여행에 다시 가장 행복했던 그 곳을 찾아갈 이유가 생기니까. 그저 모든 것을 다 보고, 누려서 행복했기 때문에 그 행복을 맛보러 다시 가는 것일뿐일테다.


다시 뉴욕에 가게 된다면, 나는 주저 말고 버치커피로 달려가 라떼 한 잔을 사서 나온 뒤 내가 가장 사랑했던 미드타운을 정처없이 걸을테다. 나의 두번째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있는 한 나는 두번이고 세번이고 이 곳을 찾을 것이다. 나를 포근하게 휘감싸는 쇼파나 침대가 있는 집보다 그 시간, 그 자체가 집보다 더 편하니까.  

Posted by shasha kim :